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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색 - S1 포로&수용소   
제목 : S1 포로&수용소
기술계층 : Seires(시리즈)
설명 : Series 1 포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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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포로수용소로 이송되는 포로들 / 포로수용소 내 활동(목공, 빨래, 운동, 종교활동 등)

items/R1 한국전쟁/S1 포로&수용소/5. 거제포로수용소로 이송되는 포로들 , 포로수용소 내 활동(목공, 빨래, 운동, 종교활동 등) .md

이 영상은 전쟁포로의 이송, 포로수용소 생활, 민간정보교육의 재교육 프로그램 일부를 담고 있어 전체 3개 주제가 포함되어 있다. 첫 번째 영상 30과 32롤 01초부터 2분 12초 내에서 포로들이 제1거제도포로수용소에 수륙양용주정을 타고 부두에서 내려 이동하고 있다. 1951년 1월부터 거제도포로수용소는 부지 선정 작업과 구역수용소, 수용동 건설 공사에 이어졌고 미군이나 한국군 경비대 숙소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3월 이후 부산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이송되어 왔다. 영상이 촬영된 8월 5일 시점에서도 여전히 대규모 포로 이송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용소 내외와 내부가 부두에서 수용소 사령부와 수용동까지 이어지고 있다. 두 번째 주제인 포로들의 수용소 생활이 담긴 장면이다. 한 포로가 3갤런(약 11.35리터) 드럼을 절단해 빨래판으로 이용하고 있다. 수용소에서 포로들은 직접 구하기 힘든 간단한 도구들을 여러 재재로 이용해 사용하고 있었다. 수용소 사령부가 포로들에게 빨래판을 제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미군 촬영병은 포로가 드럼통을 이용해 빨래하는 장면에 큰 관심으로 본 모양이다. 세 번째 주제인 민간정보교육에서 실시한 포로들의 재교육 장면들이다. 빨래 장면 다음으로 포로들이 운동장에서 배구나 권투, 역기 등 다양한 운동과 천막교회, 83수용동의 학교, 모형 배 만들기 등 직업교육과 사상 재교육, 종교 등 다양한 재교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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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1포로수용소 입소와 위생점검, 배구하는 모습

items/R1 한국전쟁/S1 포로&수용소/9. 부산1포로수용소 입소와 위생점검, 배구하는 모습.md

이 영상은 포로 포획 이후 부산포로수용소에서 다시 포로등록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포로들은 포획된 직후 포로집결소에서 1차 포로등록을 마치고 임시포로수용소에 이송한 뒤 포로심문을 받고 정식 수용소로 이동한다. 그러나 포로들은 정식 수용소 부산포로수용소에서 다시 포로등록을 받는다. 포로등록 이후 포로들은 옷 외에도 밥그릇, 국그릇, 컵뿐만 아니라 칫솔 및 치약, 신발 등을 지급 받았다. 차용한 옷의 앞뒤와 바지에 ‘PW’ 전쟁포로라는 붉은 색으로 표시가 되었다. 수용소에 입소하면 포로들은 머리부터 시작해 온몸에 DDT 소독약을 뿌려졌다. 이어서 포로들은 이발한 뒤 늦은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이처럼 포로수용소에서 포로처리 매뉴얼은 1950년 9월 14일 미 육군 헌병 현장매뉴얼(Field Manual Military Police) FM 19-5와 FM 19-10(헌병작전 매뉴얼) 이 매뉴얼은 1945년 1월 2일 처음 적용되었다가 1947년 4월 8일 개정을 거쳐 1950년 9월 14일 재개정, 1955년 1월 24일 수정되었다. 에 따라 적용되었다. 특히 FM 19-10에는 포로 및 민간인억류자 포획부터 처리규정을 담고 있다. 그 이후 1952년 5월 1일 FM 19-40(전쟁포로처리) 매뉴얼이 등장했다. 이 영상의 특징은 1947년 4월 8일 미 헌병대 작전 매뉴얼(FM 19-10)에 기초해 포로들의 등록과 신체검사, 수용소 조직, 배식 등 포로처리과정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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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기 영등포임시포로수용소와 부산포로수용소로의 이송 / 원주임시포로수용소

items/R1 한국전쟁/S1 포로&수용소/6. 전쟁 초기 영등포임시포로수용소와 부산포로수용소로의 이송 , 원주임시포로수용소.md

이 영상은 전쟁초기 영등포임시포로수용소와 집결수용소 제2원주임시포로수용소를 담고 있다. 영등포임시수용소는 미군기지 시설 내에 설치되었는데 구 일본군 건물들이며 부상당한 포로들을 이송하는 장면, 121이동병원 내부 등 다양한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포로들은 영등포임시포로수용소에서 제1부산포로수용소로 열차로 이동해 수용되는 장면이 있다. 열차에서 내린 포로들은 도보로 부산포로수용소에 이동하는 장면과 담보 등 다양한 물품들을 지급 받았다. 이어서 원주 미군기지 내 포로들이 집결해 수용되고 있는 제2원주임시송수용소는 일종의 집결수용소이며 앞의 영등포임시수용소보다 규모면에서 작다. 적십자사 자료에 따르면 원주는 유엔군 제2임시포로수용소이자 이송포로수용소라고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이 수용소는 1951년 9월 14일까지 운영되었다. “ICRC CAMP REPORT – KOREA”, RG 59, Miscellaneous Records of the Bureau of Public Affairs, 1944 – 1964, Entry A1 1587-G, Box 7, 1952. 7. 23, NARA. 한국전쟁기 포로수용소는 포로집결소, 임시수용소, 지정 수용소 등으로 나눠진다. 임시수용소는 집결소에서 온 포로들을 1개월 이내 수용하면서 포로등록 및 심문 등을 진행하다가 부산이나 거제도 등지로 이송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 영상의 특징은 영등포와 원주 두 임시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는 포로와 유엔군 제1부산포로수용소 초기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 포로수용소는 이념이나 송환여부를 떠나 국가, 계급, 성별만으로 구분해 수용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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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수용소에서의 미 육군성 군목 보켈의 설교

items/R1 한국전쟁/S1 포로&수용소/3. 포로수용소에서의 미 육군성 군목 보켈의 설교.md

이 영상은 1951년 7월 6일 한국전쟁기 민간정보교육국(Civil Information and Education Section, 약칭 CI&E)에서 기획하고 연합군최고사령부(GHQ) 71통신대대 167통신중대 소속 Helms이 포로들의 종교활동을 촬영했다. 1952년 2월 27일 미 육군 전쟁심리전국(Department of the Army office of the chief of Psychological Warfare) 준장 로버트 알렉시 맥클루어(Robert A. McClure)는 “유엔군 민간정보국의 프로그램에서 포로 레크리에이션과 운동경기 등을 포함시켜 심리전에 이용해야 한다” RG 319, Entry A1 154, Box , “Assignment of Responsibility within Department of the Army for POW Reorientation Programs”, 29 FEB 1952. 며 다양한 운동경기를 권장했다. 원래 제네바협약에서 포로들의 기본적인 운동을 명시하고 있지만 재교육이나 심리전에 이용할 수 있다는 규정은 없다. 포로수용소에서 종교 활동은 해럴드 보켈(1898-1975, 옥호열) 선교사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뤄졌다. 보켈은 칼리포니에서 태어나 북장로교에 소속된 선교사이며 1929년 8월 그의 부인과 함께 조선 안동 등지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다가 일제의 선교사 강제 철수에 따라 잠시 귀국한 뒤 1946년 안동선교부 재개와 교회복구 사업에 참여하고자 재방문했다. 그 뒤 그는 1950년 9월 미육군성 군목에 임명되어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해 바로 전쟁포로 선교 활동에 나섰다. 10월 29일 평양 서문교회에서 활동하다가 1951년 1.4후퇴 이후 부산과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다시 군종에 복무했다. 보켈은 미군 군종사령부와 미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포로수용소 선교의 협조하게 되었다. 1951년 6월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유엔군 소속 장로교 군목 1명과 카톨릭 군목 1명, 피난민 장로교 목사 4명이 포로선교라는 명목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종만, 「한국전쟁기간 미국 북장로교회 한국선교부의 활동 – 옥호열(Harold Voelkel)선교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화사학연구』40호, 20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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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의 등록 과정(지문 찍기, 사진 촬영, 물품 배급 등)

items/R1 한국전쟁/S1 포로&수용소/12. 포로의 등록 과정(지문 찍기, 사진 촬영, 물품 배급 등).md

이 영상은 포로들의 등록과정과 재교육에 이용된 각종 영화뉴스 필름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기 포로등록 매뉴얼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미군의 독일군과 일본군 등록 매뉴얼에서 시작되었다. 미 육군 헌병대는 1940년에 <전쟁포로 처리 현장 매뉴얼 19-40(FM 19-40)>을 중심으로 한국전쟁 초기에 사용하다가 1952년 5월 1일부터 1949년 제네바협약에 기초해 재수정했으며 11월 3일 재차 수정한 매뉴얼을 사용했다. <FM19-40>에 보면 일반적인 사항, 심문, 포획 방법, 수집 및 이동, 수용소 시설, 송환 방법 등이며 포로처리 관련 헌병중대의 담당 업무 등을 담고 있다. 헌병중대는 전쟁포로처리중대와 호송중대 등에서 담당했다. 일반적인 사항에는 포로들의 포획 직후 몸수색과 포로 소지 물품 및 문서 등을 노획하고 포로집결소로 호송하는 것을 담고 있다. 수용소는 포로집결소, 임시수용소, 정식 본 수용소로 나눠져 있다. 집결소에 들어온 포로들은 포로 번호와 이름 등을 기재한 포로 태그를 목에 걸게 한다. 이어서 포로들은 성명, 계급, 본적, 주소, 소속부대 등을 기재한 개인포로등록 카드에 인적사항을 기재한다. 본 수용소에 이송된 포로들은 소독과 각종 물품들을 지급받고 재차 기본정보 외에 지문등록, 사진촬영(정면, 좌우)에 응한다. 한국전쟁기 포로들은 18만 여명에 달해 포로송환 직전까지 포로등록을 마치지 못했다.